열정의 시대에 쓸모없음을 외치는 용기, <피로사회> 서평

Poem Kim 2020. 2. 24. 20:53

 

피로사회

저자 한병철

출판 문학과지성사

발매 2012.03.05.

 

 

 

열정의 시대에 쓸모없음을 외치는 용기


  ‘아프니까 청춘이다’보다 ‘아프니까 환자다’라는 말이 더 와닿는 2017년이지만 우리는 여전히 ‘할 수 있어’를 외치며 매일을 살아간다. 2007년 삼성 반도체 공장에서 목숨을 잃은 고 황유미양, 그리고 2015년의 구의역 스크린도어 사건을 보고 현실에 분노했지만 그런다고 비정규직에 대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며, 20대뿐만 아니라 어엿한 직장인이 된 3-40대도 하루를 ‘버티는 것’은 마찬가지다. 

  ‘피로사회’에서는 규율사회의 복종적 주체보다 성과사회 안에서 더 빠르고 생산적인 성과주체로 살아가는 일이 더욱 피로하다고 본다. 우리 사회는 성과사회 안에서 무한정의 ‘할 수 있음’에 익숙해져버렸고 언제나 무언가를 해내야한다는 압박에 사로잡혀있다. 우울증 환자와 낙오자를 낳는 성과사회는 긍정성이 과잉된 사회다. 저자 한병철은 우울증에 대한 알랭 에랭배르의 논의를 언급하며 에랭베르의 논의는 성과사회에 깊게 뿌리박힌 시스템의 폭력을 간과했다고 지적한다. 그는 인간을 병들게 하는 것은 과도한 책임과 주도권이 아닌 성과주의의 명령이라 말한다. ‘아무것도 가능하지 않다는 우울한 개인의 한탄은 아무것도 불가능하지 않는다고 믿는 사회에서만 가능한 것이다.’라는 문장은 ‘번아웃 증후군’을 떠올리게 했다. 의욕적으로 일에 몰두하던 사람이 극도의 신체적 · 정신적 피로감을 호소하며 무기력해지는 현상을 이르는 번아웃 증후군은 현대인의 질병 중 하나로 많이 이야기되고 있다. ‘피로사회’에서 강조하는 과다에 따른 소진과 탈진, 피로가 ‘번아웃 증후군’이라는 하나의 질병으로 이야기될 만큼 많은 이들이 소진과 탈진을 경험하고 있다는 뜻일 거다. 

 



  완벽한 대학생활을 해내야 더 나은 미래가 기다리고 있다는 뻔한 생각을 머릿속에서 지울 수 없는 대학생으로서, 그리고 누군가가 시키지 않았는데도 하루 24시간이 모자라게 빽빽한 다이어리에 할 일을 하나씩 체크해가며 스스로를 불태우는 사람으로서 나 또한 ‘피로사회’ 속 우울한 인간처럼 노동하는 동물로 자발적으로 자기 자신을 착취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뒤돌아보았다. 어느날 메모장에 ‘청춘이라는 말로 날 비행기 태우지마’라는 가사가 떠올라 끄적인 적이 있다. 청춘이라는 단어 뒤에 뭐든 다 할 수 있다는 의미가 숨겨진 것 같아 스스로 정말 많은 것들을 시도하고 있지만 동시에 그 크고 작은 ‘도전’이 사실은 자발적인 것이 아니라 ‘안하면 안될까봐’하는 불안감에 보이지 않는 떠밀림에 의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지금 마냥 쉬고 싶은 것도 아니다. 열심히 살면 ‘잘 놀 줄도 알아야 한다’고 하고 놀면 ‘지금 그러다 후회한다’고 하니 어느 장단에 춤을 춰야 할지 몰라 그 자리에서 최선을 다할 뿐이다. 그리고 ‘피로사회’에서 자기 자신과 전쟁을 벌이고 있는 인간이 다름 아닌 나라는 사실이 슬퍼질 뿐이다. 

  그렇다고 ‘피로사회’가 피로해져버린 이 사회에 대해 한탄만 하는 것은 아니다. 어렴풋이 추측 가능한 대안을 제시하고는 있다. ‘피로사회’에서 긍정만을 외치며 앞으로 나아가는 것은 자폐적 성과기계로서의 삶이다. 빨라서 편한 것이 아니라 느려서는 안되는 사회에서 즉각 반응하는 것 또한 이미 일종의 병이며 몰락이며 탈진이라고 지적하는 저자는 ‘머뭇거림’과 ‘분노’를 제안한다. 저자가 이야기하는 분노는 짜증과는 사뭇 다른 것이며, 어떤 상황을 중단시키고 새로운 상황이 시작되도록 만들 수 있는 능력이다. 우리는 분노할 때 비로소 지금 어떠한 것이 문제인지 진찰할 수 있고 돌이켜 생각해볼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피로사회’에서 저자가 제안하는 대안은 이미 우리가 한 차례씩 시도해봤던 것일지도 모른다. 쉴새없이 타인과 교류하게 만드는 ‘카카오톡’을 탈퇴하고 싶기도 하고 SNS에 올린 나의 이야기를 전부 지워버리고 싶을 때도 있다. 지금 해야한다고 적어둔 이 할 일을 모두 때려치고 싶은 충동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나는 ‘피로사회’를 덮는 순간 바로 다음 할 일을 위해 돌진할 것임을 알고 있다. 그걸 알기에 ‘피로사회’를 읽는 순간만이라도 지배없는 착취에 익숙해져가는 성과기계로서의 삶을 중단하려 노력했다. 그저 저자의 말에 공감하기도 하고 불만을 제기하면서 말이다. 나뿐만 아니라 다른 독자들 또한 ‘피로사회’를 읽고 공감했더라도 대부분 다시 성과주체로서의 충실한 삶을 살아갈 것이다. 지쳐 잠에 들고 다음날 일어나면 또 다시 더 나은 결과, 어제보다 나은 오늘을 살기 위해 노력할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아마 ‘피로사회’ 같은 책을 베스트셀러로 만들어 잠시라도 더 많은 사람들이 우리 사회에 대해 되돌아보게 만들고 다같이 공감하며 토닥여주는 일이 아닐까 싶다. 이미 열정을 다 바쳐도 모자란 시대에서 쓸모없음을 외치기 위해서는 상상 이상의 용기가 필요하니까. 

 


2017.10. by @siwanderlust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