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민의 <쓸 만한 인간>과 마포도서관

Poem Kim 2020. 2. 24. 20:48

 

쓸 만한 인간

저자 박정민

출판 상상출판

발매2016.10.26.

 

 

다 읽고나서 정돈된 글을 써볼까 생각도 했지만 이건 곧 휘발될 문장들인 것 같아 도서관에서 나가기 전 급히 두드려본다.

우리 엄마는 정해인 - 잔나비 - 슈퍼밴드 - 정해인 루트를 거쳐 박정민에 정착하는 중이다. 엄마가 넷플릭스를 알게 되고 유튜브를 알게 된 후 단 몇 개월 만에 일어난 일이다. 유튜브를 열심히 보시길래 프리미엄 끊어서 내 계정으로 로그인해줬는데 한동안 내가 보는 것들 때문에 잔나비 영상들이 안 보여서 불편하다고 하시더니 요새 안방에 들어가보면 누워서 유튜브를 그렇게 열심히 보신다. 엄마가 누군가를 좋아한다니 나에 대한 관심이 덜어져서 반갑다. 그렇게 타령 노래 만들지 말라고 내 노래를 디스했던 엄마인데 갑자기 정해인이랑 박정민 만날 수 있게 연기하고 노래하라는 말도 안되는 소리를 듣고 있자니 유튜브를 막아야하나 하는 생각이 들긴 하지만.

어제도 거실 TV에서 박정민이 출연한 보이는 라디오까지 강제시청을 하고 내내 박정민이 책도 냈다는 자랑을 들었다.

머리는 계획을 세우고 있는데 몸은 게으름을 피우고 있는 난 어제 새벽까지 음악 소스들을 긁어모으다 김영하 소설집을 마저 다 읽고 잠이 들었었다. 오늘도 아침에 일어나 한 것 없이 일부러 내가 얼마나 게으른가 테스트하는 것 마냥 뒹굴다 세 시에 집을 나섰다. 도서관에 겨우 자리를 잡고 책이라도 몇 권 빌려갈까 싶어 검색을 하는데 내가 읽으려고 하는 책은 세 권 네 권 다섯 권 죄다 대출 중. 내친 김에 ‘쓸 만한 인간’을 검색했더니 딱 한 권 대출 가능.

뭐, 이거라도 읽어봐? 꽤 사람 손을 탄 것 같은 책에 스테이플러까지 찍혀있었다. 다른 소설책도 몇 권 책상에 내려놓고 앉아서 <쓸 만한 인간>의 첫 장을 넘겨봤다. 이 사람 대단한 사람이네. 매력있네. 재능이 많네. 1부가 끝날 때는 킬킬 웃고 있었다. 이 사람 뭐야. 2부도 빨리 읽고 싶은데 책상 앞에 던져놓은 프린트물이 거슬려서 책을 덮었다. 아니 사실 덮었다가 다시 맨 뒤를 봤다. 5쇄나 찍었어? 대단쓰.

여섯시까지. 신입사원의 적응을 위해 조직사회화 전략으로 충격요법을 쓴다는 그지같은 내용을 내가 왜 외워야되는지 더욱 더 프린트물이 꼴보기 싫어졌지만…그래 여섯시까지만.

책 한 권을 집어들고 일어났다. 아차차 도서관카드. 자가대출을 하고 프레즐 가게가 있는 지하로 내려왔다. 저녁 대신이다.

‘아몬드크림치즈프레즐 하나요.’

‘5-10분 걸리는데 괜찮으세요?’

‘네.’

(음료도 시켜야하나. 아냐 비싸니까 일단 먹고 마시는 건 편의점에서 따로 ㄱ.)

창가에 있는 구석자리에 앉았다. 너무 낮아서 의자 높이를 조절하려는데 바닥에 뒹구는 볼트가 보였다. 아.

책을 손에 들고 드디어 2부를 시작했다. 아 진짜 읽을수록 이 사람 너무 이상해.

‘아몬드크림치즈프레즐 나왔습니다.’

지금 막 구워서 그런가 기름 줄줄에 뜨끈함이 전해졌다. 보기만 해도 목메네.

2004년에 19살이었다고? 대체 몇 살이야? 30살 아니었어? 대학 면접에서 저렇게 말한다고? 허허. 그가 두 번째로 간 학교를 난 왜 그만뒀는지 알 것 같았다.

목은 메는데 내 눈이 너무 글자를 빠르게 읽느라 그 속도에 맞춰 프레즐을 해치워버렸다. 다 먹고 나니 정확히 2부가 끝났다.

이 책을 읽기 전에도 그리고 읽는 와중에도 나는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나, 쓸 만한 인간으로 살 수 있을까?’.

목이 막혀 편의점을 가는 길에 괜히 아무도 없는 길로 돌아가다가 색연필 뭐시기 문구점에 들어갔다. 스터디 플래너가 눈에 띄었다. 내가 다시 저런 걸 필요로 하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었는데. 나 진짜 이제 스스로 통제를 하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나 싶어서 쓸 만한 인간이 되기 위해 고민 끝에 2000원짜리 100일 스터디플래너를 샀다. 책과 플래너를 들고 편의점에서 아몬드브리즈 초코맛을 사서 앉았다. 와우, 스터디플래너는 너무 조악해서 쳐다도 보기 싫은 정도의 속지였다. 그래도 어떡해. 100일만 써볼까. 달라질지도 모르잖아.

마저 책을 읽었다. 여친대신 클럽을 간다는 둥 농담 같은 말이래도 꼴보기 싫은 부분이 있지만 그냥 내가 요즘 좀 찌질한 시기라 그런가 우리 엄마가 그렇게 좋아하는 배우의 찌질한 20대를 훑어보자니 피식 피식 웃음이 나왔다. 아몬드브리즈 초코맛을 마저 쪽쪽 빨고 3부 중반쯤까지 읽었을 때 대출영수증을 끼워넣고 책을 덮었다. 할 것도 없고 볼 것도 없었지만 괜히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고 밖으로 나가봤다. 도서관 앞에 '하루라도 책을 읽지 않으면 입에 가시가 돋는다'는 비석이 너무 장엄하게 자리잡고 있어서 움찔했다. 습했지만 또 바람이 불었다. 이 정도면 난 오늘 기분이 좋은 것 같다.

다시 자리에 돌아와서는 한강의 ‘채식주의자’를 단숨에 읽었다. 예전에는 앞에 세 장 읽고 관뒀었는데. 아, 나 다시 책을 읽을 수 있는 인간으로 돌아왔나봐. 내심 기뻤다. 아까 샀던 조악한 스터디플래너를 펼쳐서 오늘 뭘했는지 적었다. 오늘 뭘 할 지가 아니고, 오늘 뭘 했는지를 적었다.

 

10시에 일어났는데 4시에 도서관 올 때까지 한 일이 밥 두 번 먹는 거랑 스트레칭한 게 전부라는 게 놀라웠다. 요즘 시간을 버리면서 산다는 건 알고 있었는데 좀 심했네. 근데 도서관에 와서도 한 일은 별로 없다. 책 한 권 반 읽고, 도서관에 이런 것도 있구나 하고 LP를 구경한 것, 프린트 8장을 들여다본 것, 지금 이 글을 두드리는 게 전부.

그치만 오늘 아주 홀린듯이 글자를 뱉어내고 있는 게 너무 신기해서 가만히 있을 수가 없다. 이게 무슨 종류의 글인지는 모르겠다. 물론 내공이야 있겠지만 박정민도 아무렇게나 쓴 글 같은데 괜찮길래 나도 아무렇게나 쓰고 있다. 박정민의 글솜씨에 홀린 건지 시험이 이틀 남아서 딴짓 역량이 치솟아버린 건지.

도서관이 끝났다. 그냥 그 구절만 기억에 남는다.

'어차피 끝내는. 다 잘될 거다.'

제 발로 인생의 암흑기로 걸어들어가기 직전에 빠져나온 느낌이 든다.

 


2019.07. by @siwanderlust__